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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독후감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 주요 문구별 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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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읽고 드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포스트이다. 그 전에 포스트는 전체적인 생각에 대한 글이었다면 이번에는 문단별 느끼는 감정을 작가와 비교하는 시간이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고, 카드놀이를 즐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함께 침묵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연스러운 침묵이 진정한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54-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편한 관계.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이것보다 완벽한 황금율이 어디있을까? 침묵한다는 것은 어색함의 표현도 되지만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편안함도 된다. 


에피쿠로스는 무슨 요리를 먹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할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라. 친구가 없이 식사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처럼 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55-

같이 이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이 어디있을까? 이 부분은 그 부분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누구랑 있어도 더할 나이 없이 더 없이 좋은 순간, 에피쿠로스는 그런 것을 최상의 가치로 두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16세기 프랑스의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쾌락 계산 공식을 정리해서 이런 글을 남겻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결과로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쾌락을 피해야 하고, 고통의 결과로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58-

사람들이 오해하는 에피쿠로스 사상의 가장 큰 오해를 불러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 사상은 쾌락을 추구함에도 어디서나 그 끝은 변하지 않는 쾌락을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쾌락이 우선시 되었고, 그 정신적 쾌락은 절제를 통해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다. 


"시계에 따른 시간"과 "실제 시간"을 쉽게 구분했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이 두가지 개념을 구분하는 낱말이 있었다.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의 길이, 즉 시간을 뜻하는 말로서 미래부터 현재, 그리고 과거로 끊임없이 흐른다. 예를 들면, "저오에 부두에서 만나요"라고 할 때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크로노스'이다. 시간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카이로스Kairos'는 시간의 양이 아닌 시간의 질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특히 "내 인생을 살펴보기에 완벽한 시간"처럼 적합한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72-

이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 중에 하나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편인 듯 우리 편이 아닌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이 두 가지를 구분한 점은 새로운 관점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크로노스보다는 나만의 시간 카이로스에 집중하는 삶이 에피쿠로스적인 삶이고, 진정 "철학자처럼 나이드는 법"이 아닐까?


에피쿠로스는 순간순간 느껴지는 인생의 운치를 최대한 음미하라고 권한다. 경험한 것을 완전히 음미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75-

현재를 완전히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결국 탈이 난다. 누구보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신이 놀이에 쓰려고 만든 장난감이다. 그것이 인간이 맡은 최상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그 역할에 합당하게 가장 고결한 놀이를 하면서 인생을 보내야 한다. 옭게 사는. 법은 무엇인가? 그건 인생을 놀이처럼 사는 것인가 -103- 

시점에 따라서 논란을 나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호모루덴스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문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즐기는 놀이형 인간, 즐김을 받아 들이는 라이프 스타일이 늘어나고 요즘, 이런 관점은 현재의 세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또하나의 근거가 아닌가 한다. 


어느 친구가 빈둥거린다고 하만을 비난하자, 하만은 일하기는 쉽지만 진정으로 게으름을 피우려면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진정한 게으름에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게으름이 지루함의 해독제이기도 하다. -114-

게으름!!! 이 대목이 나오기 전, 지루함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다. 무료함과 게으름은 서로 다른 의미이지만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동일한 것 같다. 무료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무료함을 게으름으로 바꿔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오래전 어느 날 저녁, 필라델피아행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 옆에서 한 여자애가 어머니에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빨리 달리면 좋을 텐데......" 흰머리가 난 어머니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얘야, 인생이 단 일분이라도 더 빨리 지나가길 바라지 마라." -114-

재치가 있는 에피소드이다. 흰머리가 있는 어머니의 대답에서 철학적 깊이도 같이 느껴졌다. 출장으로 바쁘고, 시간에 쫓겨 허덕일 때 저런 소리를 하면 뒤통수라도 날려버릴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저런 관점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을 아주 인색하게 깎아내렸다. 그는 저서 [수사학] 제2권에서 "노인들은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해서 산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나간 오랜 세월에 비해서 거의 없다. 희망은 미래에 대한 것이지만 기억은 과거에 대한 것이다. 노인들이 수다스러워지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 쉴 새 없이 지껄인다." -120-

노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어떤 면에서는 인정을 한다. 노인들 중에서 책에 나오는 긍정적인 노인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선 일명 꼰대라고 말하는 노인들도 많이 본다. 그 사람들은 우선은 상대방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그 모든게 시작된다고 본다. 세상과 나와의 관계가 닫혀버리면 그 노인은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판단하는 근거는 자기 경험밖에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꼰대가 되는 것 같다. 



"청춘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청춘이다." - 145-

청춘, 그 자체가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그 만큼 여리면서도 아픈 말이 아닌가 한다. 아름답기만 한 청춘은 그 시대를 지나간 노인의 관점이 아닐까? 요즘의 청춘도 아름다울까? 아름답기는 하다 하지만 그 앞에 하나 더 붙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처절한 아름다움. 꼭 이 시대의 청춘은 비장미같다. 


스토아 철학에서 내가 반드시 택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생각은, 내 능력이 미치지 않은 일은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209-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것 만큼 많은 도움을 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내 능력이 미치지 않은 일은 흘려보낸다. 우리는 그게 잘 되지 않아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유교 철학자 맹자는 이러한 상황을 간단히, 그러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요. 의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양자를 동시에 택할 수 없다면 나는 삶을 포기하고 의를 택하겠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 -212-

이 부분이 나온 이유는, 자기의 클라이막스를 살고 자기 삶을 끊내도 좋다라는 발언이 이 문구가 나오는 쯤에 나온다. 하지만 이 부분은 반대이다. 자기 인생의 클라이막스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맹자의 말에서는 앞서 말한 나의 논리가 맞지 않는다. 의 라는 것도 삶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결정하는 것. 맹자의 말은 이해가 되지만, 자기의 클라이막스만 살고 죽겠다는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  


곧 들이닥칠 초고령기 때문에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스토아 철학에서 배운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초고령기에 이르기도 전에 초고령기에 겪게 될 두려움에 집중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아직 남은 아주 적은 시간을 내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사로잡혀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이 시간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222-

이 부분이 주는 교훈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로 나는 해석된다. 


순수한 놀이는 신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신념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스 노인 다섯 명이 한밤중에 인생을 찬양하며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던 광경을 다시 떠올려본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초월적인 차원을 얼핏 보았다. 이 인생 예찬이 결국 우리가 믿을 만한 종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광경을 목경할 기회는 극히 드물다. -243-

마지막은 결국 삶을 하나의 놀이처럼 살아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삶이 놀이이 듯 그 놀이 자체를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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