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것도 죽음에 관한 책이. 라틴어 중에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있다. 죽음에 관한 글을 읽으면 꼭 인용되는 말 중에 하나다. 뜻은 '네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나오면 곧이어 따라 오는 말이 '카르페디엠'이다. 요즘에는 워낙 유명해서 특별히 해석을 안해도 알것이다. '현재를 즐겨라.'
유시민 작가가 쓴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이 두 단어가 언급된다. 하나는 죽음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삶을 말하지만 사실 이 두 단어는 한 몸과 같다. 죽음이 올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에는 여러 환상 속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죽지 않는 인물도 있다. 소설 속 그의 소원은 하나다. 죽는 거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서로 철천지 원수의 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산소와 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죽음에 관하여'를 처음 읽은 것은 웹툰이다. 당시 워낙 할 일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주위에서 한창 '죽음에 관하여'라는 만화가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봤는데, 이거 웬걸! 내용이 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을 스크롤을 올리고 내려도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웹툰 밑에 있는 댓글을 보고서야, '아! 이런 내용이구나' 했다. 그만큼 함축이 많았고, 그 함축으로 인해 빈 공간을 생각과 공감으로 채우는 만화였다.
이 책을 다시 봤을 때, 처음 봤던 웹툰의 감동이 없었던 것은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댓글이 없기 때문에 공감이나 이해도가 떨어진게 아닐까 한다. 그래도 옛 기억을 더듬더듬 거리며 좋은 에피소드 몇 개가 있었다. 바로 가장 유명한 살인자 이야기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어느 날 택배기사를 가장한 살인범이 신혼인 남편과 아내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름 돋는 것은 이것을 죽음으로 어떻게 표현했느냐는 거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설을 많이 들어왔다. 유명한 작품 중에는 단테의 '신곡'도 있고 웹툰 중에 '신과 함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는 그런 인과응보적 죽음이 아니다. 그냥 공허한 공간에 신(?)이라 불리기에는 조금 패셔너블한 중년의 아저씨 한 명이 있다. 그 아저씨한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음 생으로 환생하면 끝이다.
너무 단순한 것 같지만 그 환생하기 위해 걸어가면서 주거 받는 대화나 행동들이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살인마의 경우에는 그 신(?)을 두 번 만나게 된다. 한 번은 자기가 죽인 남편으로 빙의되어 만나고, 또 한번은 아내가 되어 만난다. 그렇게 그는 죽은 그 사람들의 한을 고스란히 두 번 느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신은 생각한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두 번째로 소름끼치는 에피소드는 총이다. 그렇다 이 에피소드는 총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총은 누가 들고 있냐하면 바로 신이다. 그럼 총알은? 바로 죽은 사람의 호주머니에 있다. 그 총알은 자기가 생전에 힘들게 한 사람들의 고통인 것이다. 그 총알 한 발 한 발이 자기가 고통을 줬던 사람들의 아픔만큼 비례한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총알이 두 발이 있었다. 그런데 그 총알에는 1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총알을 맞고 죽을 듯이 아파한다. 알고 보니 그 총알은 자기가 남기고 간 아들들이었다. 사실 그 남자는 삶을 비관해 아들들을 두고 자살을 했던 가장이었다. 남은 가족의 아픔을 느끼고 그는 자살 대신에 삶을 선택하게 된다.
또다른 총알 에피소드는 어떤 할아버지가 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총알로 자신을 마구 쏴 달라고 한다. 자기는 죄를 지었다고, 그만큼 모질게 고통 받아야 한다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도 그는 또다른 삶을 택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옥에 데려다 달라며 그 공허한 공간에서 1년간 자책하며 지낸다. 그리고 1년 후 신이 그에게 다가와서 한 마디 한다. '당신은 지금껏 지옥에 있었다고.' 사실 그 할아버지는 1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한 아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잇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이야기 말고, 또 여러 에피소드가 생각 나지만 딱 하나만 더 이야기 하고 글을 줄여야 겠다.
한 남자가 신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죽은거냐고 백번 묻는다. 신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자는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냐고, 도움을 주지 않았냐고 통곡을 한다. 그러자 신은 시니컬하게 이렇게 말한다. 백번 말렸다고, 다만 당신이 나의 그 이야기를 흘려 들었다고.
마지막에 이 에피소드를 적인 이유는 하나다.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거다. 죽음은 우리를 비관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존재다. 그리고 죽음 역시 우리가 예상보다 빨리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로 오지마라고, 더이상 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를 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고를 우스게 소리로 여기고 그냥 넘어간다는 거다. 이 점만은 꼭 말하고 싶었다.
죽음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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