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유시민이라는 작가가 핫해졌다. 처음에는 유시민작가에게 '작가'라는 말을 붙이는게 어색했다. 내 기억 속 유시민작가는 정치인이었다. 사실 그의 책을 지금껏 읽어 본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는 2000년대가 시작하기 전부터 작가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책을 쓰기로 했을 때, 유작가는 인터넷에 우선 검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죽음에 관한 여러 책들이 검색 결과에 나왔다고 전했다. 이 이야기가 서두에 나왔던 것처럼 이 책은 삶보다는 죽음을 말하는 책 같다.
책의 파트 역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로 진행된다. 어찌보면 이번 책은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자기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가 있다. 대학교에 들어간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데모했던 이야기, 고문받던 이야기까지...... 한 마디로 이 책은 그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 느낌이다. 그래서 이 책 만큼은 특별하게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없다는게 나쁜 의미가 아니다. 일부러 공감을 불러내기 위해 삶을 정의 내리고 말을 가다듬고, 어울리지 않는 은유를 하는 것이 없었다고 보는게 더 맞다. 그는 이 책을 마지막 에필로그처럼 썼다. 그는 자기가 죽을 때 했으면 하는 것들을 에필로그에 적었다. 낮잠자듯이 죽지 말고 2~3일 정도 누워있다가 죽고 싶다며, 그 때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고 남아 있는 사람들과 사전 장례식을 치루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사전 장례식을 치뤘던 다른 망자 '유진 오켈리박사'처럼 지구를 떠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마지막 소망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들 호상이라고 부르는 어느 날 갑자기 잠자듯이 죽는 것은 없었으면 하다는 점이다.
그는 아픔에서 오는 두려움에 의해 사람들이 잠자듯이 죽는 것을 바라는 것 같은데, 사실 이는 살아있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자기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유시민 작가는 어릴 때, 꿈이 없었다고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성이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의 펑크락을 지향하는 '크라잉 넛'이 그런 점에서 부럽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어릴 적 자기의 삶은 온전한 자기의 삶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카뮈의 말을 빌어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자살하지 않은가."
자살이라는 것은 인간이 의사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했던 카뮈의 말을 빌어 자기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의 숨은 의도는 따로 있다. 바로 그냥 막 살지 말고 내가 살고자 하는 의미를 찾으라는 거다. 유작가는 그 의미를 찾는 방법 중 '위로'는 사실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삶이란 힘들고 어려운 것이기에 그 힘듬 삶을 견디고 부딪혀나가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는게 올바른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라 말한다. 그리고 앞선 카뮈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말한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이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그가 말하는 해결책은 단순하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그의 이런 해결책은 앞서 말한 막 사는 것과 비슷해보이지만 또 다르다. 막 사는 것은 지금 흘러가는 대로 자기를 수동적으로 놓아버리는 행위다. 그에 비해 유작가가 제시한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수동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즐거운 것을 잘할 수 있도록 행동하고, 내 재능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고,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열심히 행동하는 것.
유작가는 이 짧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챕터를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이며 공감하게 만들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있도록 옛이야기처럼 읊어줬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파트가 바로 세 번째 파트인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였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 버린 파트였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놓칠뻔한 파트 역시 세 번째 파트다. 그에 반해 가장 읽기 힘들었던 파트가 바로 두 번째 파트인 '어떻게 죽을 것인가'다.
이 파트가 유난히 힘들게 읽혔던 이유는 공감이 잘 안가서였던 것 같다. 내 나이 31살. 아직은 젊다면 젊고 나이인지라 죽음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두 번째파트의 내용이 점점 존엄사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투로 흘러가서였다. 뭔가 특별하거나 새로울 것인 없는 흐름이었다. 죽음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 거의 비슷한 톤앤매너로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뻔한 이야기인지라 집중이 잘 안되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 파트는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이다. 이거 역시 두 번째 파트와 연관이 된다. 출생이라는 제비뽑기에 당첨되지 않아 현재의 자기 삶을 비관하는 것들과 진시황처럼 삶을 놓치 못하면서 생기는 최악의 경우들을 설명했다. 그는 여기서 이런 것들에 얽메이는 것보다 현재의 삶을 더 주도적으로 당차게 즐기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책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꼭 '에피쿠로스학파'의 삶의 논점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일명 '쾌락주의'로 불리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사실 쾌락보다는 현재의 삶을 더 잘 즐기는 것에 촛점을 맞춰있다. 예전 그와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이었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일주일에 한번 밖에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한다. 한 사람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아이스크림을 매일 사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이는 사양한다. 매일 맛보는 아이스크림과 일주일의 한번 맛보는 아이스크림의 맛은 다르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는 참고 나서 그 뒤에 오는 아이스크림의 맛이 더 짜릿하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역시 쾌락주의로 오해를 산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계급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누구나 그와 함께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쿠로스가 있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 당시 창녀들은 피박박는 계급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당시에 장원이라고 하는 공동의 무리를 이루고 살았는데, 창녀들은 가끔 이곳에 들러 에피쿠로스와 서스름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을 아니꼽게 바라본 당시의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와 그 학파를 문란하다고 욕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가치관은 오히려 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정신적 가치를 더 높이는 데 있었는데 말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내용을 정리하면 완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작가는 현재의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 내 감각을 모두 동원하여 현재를 즐기고 이 즐거움을 바로 지금 공유하고 충분히 누리는 것이 답이 아닌가하고 자기의 생각을 322쪽에 걸쳐 서술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그리고 자기의 삶에 대한 방향성은 역시 각자가 정해야 할 듯하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살았다는 것이다.
유작가는 그렇게 막 사는 것은 진정한 자기의 삶이 아니기에 자기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방법이 바로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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