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사실 괴테의 저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니 뭐 굳이 관련성을 찾아보자고 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 괴테가 등장한다는 정도?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등장하는 한 단락의 소제목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다. (분명 실연에 대한 위안 부분이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이야기)
이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책의 온저인 "철학의 위안"이 더 이 책의 주제에 부합하는게 아닐까 한다.
책 제목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다음은 작가론이다. 이 책의 작가는 '알랭드보통'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일상의 철학가로서 대표작으로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불안", "뉴스의 시대", "여행의 기술" 등 벌써 내가 읽은 책만해도 2권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만큼 철학이라는 장르는 쉽고 이해하기 좋도록 책에 잘 기술하는 작가가 아닌가 한다.
그런점에서 이 책의 그의 철학적 담론이 아주 깊게 들어간 책이다. 흡사 처음 느낌은 "강신주의 감정수업"과도 비슷했다. "감정수업"은 소설에 나오는 감정들을 하나씩 집어 그 감정을 철학적 관점에서 풀이해주는 책이다. 그에비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6가지의 위기 요소에 대한 철학적 위안을 주는 책이다. 깊이로 보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감정수업"보다 깊다.
그 이유는 바로 한 위로당 한 철학자를 깊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에는 총 6가지의 위기 요소가 있다.
인기없음, 빈곤, 좌절, 부당함, 실연, 고통. 이 각각의 위기요소에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 이들은 나름의 각각의 요소에 확고한 답을 던져준다.
우선, 인기 없음에 대한 소크라스의 위안이다. 그가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은 자신의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비판 받는 것에 대한 충고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페이지 49쪽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어떤 반대에 봉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을 그릇된 것으로 확신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는 대중의 판단을 무시하지는 말되, 그렇다고 너무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도 말라고 말한다.
비판의 가치는 비평가들의 숫자나 지위고하가 아닌, 그들의 사고 과정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관점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는 이성과 확고한 자기 의지로 표현된다.
두 번째 위안은 빈곤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에피쿠로스는 곧 쾌락'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사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이라고 하는게 더 맞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3가지 분류로 나눴다. 꼭 필요한 것, 있으면 좋은 것, 없어도 상관 없는 것. 이 3가지 분류에서 그는 꼭 필요한 것들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그는 언제나 절제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는 빈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 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것이 빈곤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위로이다. 눈에 보이는 부가 아닌 정시적 쾌락을 더 중요시하라는 메시지다.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이 정신적 쾌락을 위해서는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색과 여러 사람들과의 담소를 나누라고 한다. 실제로 그가 마련한 장원에서는 당시에 천대 받는 사창가의 여자들도 동일하게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잘못 전파되어 '에피쿠로스는 곧 쾌락'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다.
세 번째 좌절에 대한 위안은 세네카가 주고 있다. 사실 세네카라는 인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의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인 동시에 그의 손에 의해 죽은 인물이다. 그는 또한 에피쿠로스의 이념을 따르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이다. 그는 좌절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에서처럼 그가 좌절을 대하는 철학적 태도는 대비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비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 예시로 우리가 리모콘을 찾는데, 리모콘이 보이지 않아 화를 냈다고 하자. 이 또한 하나의 좌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네카가 말하는 좌절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현실에 벽에 막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살펴보면 되게 믿고 있는 이상에 대한 좌절 때문이다. 세네카의 말을 적용하면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이 좌절은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정상인지 알게 해주는 경험에 따라 대부분 누그러진다. 인간은 자신이 갈망하는 대상을 거부당할 때마다 분노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오직 우리 자신이 그 대상에 손을 넣을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고 굳게 믿을 때만 그렇게 된다. 가장 격한 분노는 존재의 기본 원칙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날 때 터져나온다.
이 말을 알랭드 보통은 아래와 같이 해석해 놓았다.
리모콘을 찾지 못할 때 고함을 지르는 것도 리모콘이 다른 자리에 잘못 놓일 수 없는 세상을 은근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격노란 우리의 앞에 닥친 좌절이 결코 삶의 게약서에는 씌어있지 않다는 확신에서 야기된다.
그렇다면 좌절을 맞이하는 가장 큰 해결책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해결책은 체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체념하라는 것은 아니다. 세네카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삶은 운명의 여신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운명의 여신의 목줄에 걸린 강아지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앞으로 가자고 목줄을 당기는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면 결국 목만 아플 뿐 결국 여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 때, 운명의 여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목이 아플 이유도 없이 자연스렇게 그 운명을 받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과연 모든 운명을 다 받아들이고 체념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로이 만들어갈 수 잇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세네카가 말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책에서는 그 상황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세네카도 자신이 가르친 네로의 손에 의해 죽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이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소크라테스처럼 겸허이 받아들인다.
네 번째는 부당함에 대한 몽테뉴의 위안이다. 사실 이 부분이 나로써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량으로 봐도 6파트 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많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부당함은 지식에 관한 것이다. 지식이 없다고, 혹은 내가 못 배운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다. 몽테뉴는 네 번째 파트 내내 당시의 지식이라 불리는 것들의 부당함을 아니, 못 났음을 까발리고 있다.
이성이 인간에게 자리 잡은 것은 우리를 고문하기 위해서라고 감히 결론 내려도 괜찮을까?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된 결과,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지 몰는 평정과 안일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몽테뉴는 그의 저서 '수상록'에서도 그렇지만 지식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한 지혜를 더 강조해왔다. 그리고 지식에 관한 자기의 관점을 서재의 나무 들보에 새겨 놓았다.
가장 행복한 삶은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다. -소포클래스
다섯 번째는 실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위안이다. 그는 염세주의자이자 생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사실 그가 말하는 생철학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성을 지닌다. 결국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복보다는 2세를 위한 투자로써 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위안이다. 어찌보면 쫌 찌질한 위안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책에 나와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맨날 여자에게 차이고, 여성을 싫어하는 투의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을 ......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행복이란 살아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가정 아래에 행복 사냥에 나서는 일이다.
이런 말들을 볼 때, 그가 염세주의자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지막 위로는 고통에 대한 니체의 위로이다. 니체에 대해서는 "짜라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통해서만 들어봤다. 그리고 '초인'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초인'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세우기도 했다.
초기 니체를 영어로 옮겼던 번역자들은 부주의하게도 위버멘쉬(초인)을 전설적인 만화의 주인공 슈퍼맨으로 옮겨 적었다. 그러나 니체의 위버멘쉬는 하늘을 휙휙 나는 인물이나 파시스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위버멘쉬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도 정열, 사고보다도 육체를 존중할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초인을 강조하는 니체의 관점에서 고통에 대한 위안은, 그 고통을 버텨라는 것이다. 그는 기쁨, 성공 등의 요소는 아픔, 고통 등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실 이 두개는 한 씨앗에 들어 있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는게 그의 관점이다. 그는 이 고통의 씨앗을 심어 잘 키워야 기쁨과 성공의 단 맛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말을 통해서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것들은 그와는 분명히 정반대인 사악한 것들과 교묘하게 얽혀 있고, 사슬로 꿰어져 있다"고 말했다. "사랑과 미움, 감사와 보복, 선한 본성과 분노는 서로 뒤얽혀 있다." 이 말은 그런 감정적인 것들을 더불어 함께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 성공적으로 다듬어진 결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더불어 경험을 통해 그리고 실패를 통해 얻는 성공을 더 큰게 존중했다.
천재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자 말라. 타고난 천재라고! 모든 분야에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율을 남긴 사람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그들은 부족한 자질을 일궈가면서 스스로 위대함을 획득하여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천재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장인의 근면함과 치열함을 갖추고 있어서 감히 훌륭한 완성품을 내놓기 전에 각 부분들을 엄격하게 구축하려 애쓴다. 그들이 그런 시련의 시간을 갖는 이유는 황홀한 완성품이 주는 효과보다, 보잘것 없고 신통치 않은 것들을 더 훌륭하게 개선하는 작업 그 자체에 보다 많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앞서 6개의 요소에 대한 각 철학자들의 위안(?)을 보았다. 어쩌면 위안이라기 보다는 자기 합리화라고 보는 것도 맞고, 혹은 더 상처를 후벼파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각 철학자들의 고나점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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