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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드라마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드라마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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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애플TV

2022년 핫한 드라마가 하나 있었다. 바로 드라마 파친코이다. 우리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원작 소설은 이미 미국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었고, 수많은 제작사에서 드라마화 요청을 받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민진 작가가 요청한 한 가지 때문에 다른 유수의 제작사를 물리치고 애플 TV가 제작하게 되었다. 

 

이민진 작가의 요청은 단 하나, '동양계 주인공을 써야 한다.'였다. 사실 예전 공각기동대에서도 나온 화이트 왁싱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당시 공각기동대 영화에서도 일본인 주인공 역할을 스칼렛 요한슨이 맡으면서 화이트 왁싱 논ㅇㅇㅇㄴㄹ쟁이 붙기도 했다. 이번 이민진 작가의 요구가 없었다면, '파친코' 역시 공각기동대와 마찬가지인 화이트 왁싱의 사례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유일하게 애플 TV만이 동양계 배우로 제작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애플 TV에서 서비스하게 되었다. 그만큼 많은 반향과 이슈를 불러일으킨 드라마가 '파친코'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파친코'의 의미이다. 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은 일제 침략기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여성들이 광복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재일교포이고, 일본에서는 줄여서 재일(자이니치)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들이 살아간 힘들고 고난한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영화의 시작은 선자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선자의 아버지는 언청이로 어렵게 결혼을 하게 되고, 귀하게 자식을 낳게 된다. 그 전에도 여러 자식들을 잃은 경험이 있어 이번 자식은 오래 살 수 있는지 점을 친다. 그리고 드라마 중간중간에 단순히 살아가는 것과 멋지게 사는 것 등의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여러 선택지와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스토너'나 위화의 '인생'처럼 살아간다는 그 자체의 묵직함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그 속에는 한일 간의 깊은 역사적 골도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야 할 거리가 있다. 바로 화자, 즉 주인공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두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시대극에서는 전체적인 역사의 기록이 남는 남성들을 주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최근 들어 추세는 입신양명을 주요 목표로 하는 남성들과 달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여성들의 삶을 많이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선자 역시 가정을 지키기 위해 힘든 형편에서도 올곧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큰 구조가 아닌 아주 작은 구조. 우리의 일상처럼 그들도 어려운 환경, 전쟁이 터지는 환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견뎌내는 모습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고 있다. 

 

아무리 현재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쟁 중인 당시에 비해서는 나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기도 하겠다) 여기서는 그때에 비해 지금이 나아졌으니까 참고 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때나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에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하다. 

 

드라마의 시점은 크게 2개의 시점으로 교차된다. 선자가 젊었을 때의 1920~30년대.  선자의 손자가 있는 1970~80년대이다. 근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삶을 살아가는 재일교포 2세인 솔로몬도 삶의 무게 앞에서 허우적 된다. 재일교포 3세라는 점과 그에 따른 세상의 알게 모르게 깔려있는 차별의 시선. 그리고 그것을 헤쳐서 성공하기 위한 몸부림. 선자가 젊었을 때도 전쟁통이었지만, 솔로몬이 있는 70~80년대도 차별의 시선이 깔려 있는 하나의 전쟁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드라마에서는 살아 있다는 것 이외에도 하나 더 이야기하는 듯하다. 1기라고 할 수 있는 이번 파친코의 후반부 (5화 6화 정도) 몸의 윤곽에 대해서 나온다. 선자의 남편인 백 목사가 재일교포들이 있는 마을에서 목사를 하다가 어느 아녀자의 부탁으로 그녀의 자식을 설득하러 간다. 그러자 아녀자의 아들은 이런 말을 한다. 

 

목사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두려움에 몸이 짓눌려 내 몸의 윤곽이 흐려져 사라지는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일본의 감시 아래에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살아가는 청년의 한스러운 말이었다. 그 깊은 좌절감에 백목 사는 뭔가가 느끼는 게 있었던 듯하다. 이후 6화에서 선자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고뇌에 빠져있는 형에게 다가가 이 말을 전한다

 

자기의 몸의 윤곽을 똑바로 보고 살았으면 해

몸의 윤곽. 어쩌면 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1화에서부터 이어오는 '살아간다' 혹은 '살아있다'의 의미와도 같이 연결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파친코는 필자에게 무작정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여러 상징이 숨어있고, 그 상징이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영상미와 대사가 묵직한 추를 단 듯 가슴속에 자꾸만 가라앉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한 번쯤은 봐야 하는 드라마가 아닐까 한다. 

 

전 세계적인 OTT 서비스이며, 특히 일본의 지분이 높은 애플 TV에서 반영했기 때문에 여러 비판과 논란거리도 많았다. 일본을 미화한 것도 있다는 것에서부터 그래도 이 정도면 선전했다는 말까지. 하지만 그런 논란을 넘어 단지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은 충분히 해주지 않는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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