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은 과거에 쓰였지만, 현재에 다시 주목받는 책들이 있다. 어찌 보면 이번에 독후감을 쓰는 1973년의 핀볼 역시 그런 책이 아닐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초기작이라는 타이틀이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읽어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책이 별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책만 던져졌을 때, 과연 나라는 필자는 이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책이라는 것을 읽게 만드는 이유는 다양하고 그중에서도 저자라는 것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화를 볼 때, 감독이 누군지 확인하는 거랑 다를바가 없다. 어쩌면 저자나 감독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하나의 화자가 아닐까 한다. 어떤 화자는 말을 엄청 빨리 속도감 있게 할 수도 있고, 어떤 화자는 느릿느릿 늘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 전달 방법에 따라서 동일한 이야기라도 듣는 이가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이야기를 더 맛깔나게 하는지 중요하게 살펴본다.
하루키라는 화자는 살짝 무심하면서도 디테일하게 내뱉는 단어의 은은함이 있는 화자가 아닐까 한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건조하게, 아니 무채색의 콘크리트 벽과 같은 단단함이 느껴지는 화법을 구사하는 화자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벽이 생각난다. 화려한 색채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태생적 흉터까지도 모두 드러내고 있지만 그 어떤 장식보다 일체감 있고 단단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버렸음에도 다 채워지는 듯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한 화법이 하루키라는 화자의 말하는 법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1973년의 핀볼은 그의 초기 특색들이 다듬어 지지 않은 듯 거칠게 드러난 초기작이다. 당시 하루키는 바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이 책의 마지막에도 이 글은 부엌 테이블에서 완성한 글이라고 적고 있다.
마치 음식이 완성된 것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부엌에서 정신을 채우는 음식이 완성된 꼴이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자기의 또다른 자아인 '나'를 생산해낸다. 그리고는 허무하면서도 자기의 무언가를 채워주는 어떤 한 물체를 찾아가기 위해 불철주야로 돌아다닌다. 그 물체는 바로 '핀볼'이다.
필자는 참고로 화자가 나눠지는 글은 잘 집중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는 '나'라는 화자와 쥐라는 화자 두 명이 거의 교대로 나온다. 처음에는 '쥐'라는 것이 실제 쥐라고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쥐'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은 비평문에서 '쥐'는 또 다른 자아인 '나'가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서는 말하는 이(여기서는 책 속 화자를 말하는)가 사람이 아닌 존재하고도 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토성에서 온 존재와 금성에서 온 존재하고도 이야기를 듣고 하는 모습이다.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 혹시 이 작품이 판타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평문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은유로 과거의 '나'를 금성에서 온 존재와 토성에서 온 존재로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가 뜨겁게 사랑하던 그때의 모습이 금성에서 온 사람이고, 혁명의 깃발 아래 투쟁하던 모습이 토성에서 온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다.
이 부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나오는 여자... 나오코. 사실 필자는 나오코라는 존재를 거의 인식 못하고 옛 사랑 정도로만 생각하고 글을 읽었다. 그런데 비평문을 읽고 나서야 그녀가 '나'의 옛 연인이고 현재는 죽은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오코'는 하루키의 또 다른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거다. (해변의 카프카인가? 여하튼)
그래서 그는 그 아픔을 잊기 위해 몇 년간 알바비로 핀볼을 했다는 거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죽은 나오코가 한 말이 떠올라 그녀가 살던 역 근처에 있는 개를 보러 갔다가 헛걸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와보니 어디서 온지도 모를 쌍둥이가 집에 들어와 있었다.
그렇게 쌍둥이와의 동거를 하던 도중, 일요일 배전판을배전반을 바꾸기 위해 온 사람을 맞이하고, 그에게 아침을 챙겨준다. 그에 감동했는지 배전반을 바꾸러 온 사람은 교체한 배전반을 '나'의 집에 두고 떠나버린다. 쌍둥이는 이 배전반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나중에는 장례식까지 치러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나오코와 헤어지고 나서 미친듯이 했던 '핀볼'이 떠오르고 그때의 '핀볼'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로 수소문을 한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너무 두서없다. 그리고 비평문을 읽고나서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즉, 나에게는 너무 추상적인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 빠르게 대충 읽었어였을까? 아니, 지금 이렇게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도 아귀가 전혀 맞지 않고 툭툭 튀어나오는 듯한 서술 구조가 보인다.
이 소설에서 하루키는 불안정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가지 소설 속 인물로 묘사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고 비평문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비평문을 읽기 전에는 오히려 소설 속 모든 장면이 하나의 핀볼 기계 속 부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쌍둥이는 핀볼 속 조작 버튼이고, '나'라는 화자는 핀볼 기계 속 핀볼인 것이다. '쥐'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기계 속에 있는 쥐 정도로 생각했지 않을까 한다.
초기작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하루키라는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내가 빠르게 캐치를 못해서 그런가. 이 책은 나에게 있어 조금 어려운 책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럼에도 하루키 나름의 무심하고 무채색의 감성은 담고 있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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